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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n

스파이크 에드니의 롤링스톤 인터뷰

2019년 8월 28일 랩소디 투어 북미투어 중 롤링스톤에 실린 스파이크 에드니의 전화인터뷰

35년간 퀸과 함께한 스파이크 에드니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그의 음악 생활부터 퀸과의 만남, 프레디의 추모공연과 퀸과 폴 로저스, 그리고 현재 퀸버트까지.

 

 

퀸의 키보디스트 스파이크 에드니가 라이브 에이드와, 프레디 머큐리가 실제 어땠는지에 대해 말하다.

이 밴드의 비밀 병기는 퀸과 35년을 공유했다. 프레디와 함께한 Trivial Pursuit부터 아담 램버트를 발견하기 까지.

 

 

By Andy Greene

 

 

퀸의 전설적인 무대 라이브 에이드영상에서 스파이크 에드니를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1222초쯤 해머 투 폴이 끝날 무렵 잠시 멈추면 당신은 무대 뒤의 그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키보드 옆에서 기타를 치는 어두운 색 머리의 남자입니다. 퀸은 그 당시 키보드, 피아노, 백보컬 그리고 리듬 기타의 백업을 위해 1년 전 그를 고용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도우며 줄곧 그곳에 있었습니다. 1992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서부터 그들의 웨스트엔드 뮤지컬 위 윌 락 유’, 2000년대 중반 폴 로저스와 함께한 그들의 투어와 현재 진행 중인 아담 램버트와의 공연까지.

 

에드니는 지난 35년간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지만, 많은 팬은 그의 이름조차 모릅니다. 퀸의 랩소디 투어가 매우 성공적으로 북미 지역을 강타함에 따라, 우리는 그의 밴드에서의 오랜 재임과 라이브 에이드 무대가 어땠는지,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어떻게 램버트를 발견했는지, 그룹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듣기 위해 에드니와 전화 인터뷰를 했습니다.

 

 

투어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환상적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랩소디투어 이전 두 번의 투어는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랩소디 투어는 이를 다른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지난 밤 뉴올리언스 관중들은 제가 들어본 것 중 가장 열광적이었다고 생각해요. 모두들 정말, 정말로 즐기고 있었어요.

 

당신의 음악 인생을 간략하게 듣고 싶어요, 당신이 처음으로 본 공연은 무엇이었나요?

저의 12번째 생일에 엄마가 데려간 비틀즈 공연이에요. 1963123, 제 고향인 포츠머스 길드홀이었어요.

 

와, 공연은 어땠나요?

당신이 12살이고 그게 첫 콘서트였다면, 이건 감각에 대한 맹공격 같을 거예요. 가장 실망했던 것은 사람들이 소리 지르는 것 때문에 단 한 곡도 들을 수가 없었어요. 누군가 마이크 앞에서고 머릴 흔드는걸 보며 무슨 노래를 하는지 알 수 있었어요. 바디랭귀지를 통해 무슨 노래인지 알았죠. 그들은 7곡 정도를 했어요. 다른 공연자들도 있었거든요. 2시간 30분 동안 진행되고 모든 게 고화질인 요즘의 콘서트 같진 않았어요.

 

이것을 직업으로 하고 싶다고 깨달은 게 몇 살이었나요?

그날이요.

 

퀸을 알게 된 첫 기억을 얘기해주세요

저는 70년대 초기에 멜로디 메이커에서 그들에 대해 읽고 있었어요. 처음엔, 그 이름을 듣고 화가 났어요. “어떻게 감히 자기들을 로얄 패밀리로 부를 수 있어?” 제가 처음으로 들은 곡은 나우 아임 히어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소울 음악의 팬이었죠. 제 영웅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와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Sly and the Family Stone)이에요. 당시 저는 영국 음악보다 미국 음악에 빠져있었어요. 글램록 세계의 긴 머리와 새틴셔츠는 제 취향이 아니었어요. 저는 어스, 윈드 앤 파이어(Earth, Wind and Fire)가 좋았어요. 새틴셔츠를 입고 있긴 했지만.

 

그리고 퀸이 라디오 콘서트를 한다고 들었어요. 저는 처음에 그들이 복잡한 방식을 가진 헤비밴드라고 치부했었죠. 저는 나우 아임 히어를 좋아했는데, 이 곡은 보통의 작곡패턴을 따르지 않았거든요. 당시 모든 사람들이 하던 평범한 팝송으로 쓰인 것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킬러 퀸이 발매됐고 그 안의 재능은 확실했었죠. 하지만 전 팬은 아니었어요. 저는 흥미를 가진 관찰자였죠.

 

 

1970년대에 그들의 공연을 본 적 있나요?

아뇨. 저는 라디오에서 들었어요. 퀸은 앨범에서 여러 층으로 된 기타와 화음을 연주했지만, 물론 라이브에서는 그걸 할 수 없었죠. 그래서 전 제작적인의 관점에서 볼 때 약간 실망스럽다고 항상 생각했어요. 저는 짜증스러운 음악가였고, “이걸 제대로 할 수 없다면, 대체 이걸 왜 하는 건데?”라고 생각했어요. 질투였죠. 그래서 공연을 안 갔어요.

 

 

당신은 “Come On Eileen”이 히트한 후 덱시즈 미드나잇 러너스(Dexys Midnight Runners)와 투어 했죠. 어떻게 할 수 있었나요?

 

전 한동안 트롬본 연주를 하며 먹고 살았고, 80년대 내내 듀란듀란(Duran Duran)과 덱시즈(Dexys) 그리고 밥 겔도프의 붐타운 랫츠(Bob Geldof’s Boomtown Rats)와 일했어요.

 

덱시즈는 즐거운 경험이었나요?

별로요. 저같이 고용된 사람이 셋에서 넷 정도 있었고, 호른 연주자와 베이시스트였어요. 우린 도중에 실패했거나, 하기 싫어한 사람들을 대신하고 있었어요. 그들은 그들 밴드만의 에너지와 리듬을 가지고 있었고 리드싱어에 의해 매우 많이 지배되고 있었어요. 당신이 고용되어 그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입을 다물고 그냥 관찰하고 당신의 일을 하도록 해요. 그는 완전하고 절대적인 충성심을 원했어요, 트럼프처럼요.

 

퀸에 합류하게 된 얘기 해주세요. 그들은 82년 투어까지 항상 4명이었죠. 그들은 두 키보디스트를 여러 포인트에 사용했는데요. 어떻게 그 다음 투어에 합류하게 됐나요?

제 기억이 맞다면, 첫 연주자는 모건 피셔(Morgan Fisher)였어요. 그는 프레드와 사이가 틀어졌죠. 제 생각에 그는 어느 날 샴페인과 리무진을 타고 신나게 떠난 것 같아요!

 

큰 실수였네요.

프레드와 저는 그게 큰 실수라 말했죠. 적어도 그는 전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들은 프레드 만델(Fred Mandel)을 영입했어요, 앨리스 쿠퍼와 연주하던 사람이었죠. 퀸이 그를 어떻게 찾았는지는 모르겠네요, 어쨌든 그가 맡았어요. 그가 제 전임자였죠. 그가 모건 피셔가 완성했어야 할 투어를 끝냈어요. 밴드는 전설적인 남미투어를 끝낸 후 휴식을 취했고, 뮌헨으로 가서 더 웍스를 완성했어요. 맨들은 녹음에도 참여했어요. ‘라디오가가아이 원트 투 브레이크 프리에 참여했죠. 밴드가 투어를 할 때쯤에, 그는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어요. 아마 그는 거절할 수 없는 일로 빠지게 된 것일 지도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이 필요했어요. 이건 정말로 적절한 장소에서의 적절한 시간이었어요. 저는 런던의 바에서 연주하고 있었는데, 퀸의 크루 중 한명이 왔어요. 제가 10년 전에 알고 있던 사람이었죠. 그가 “요즘 뭐하고 지내?” 하고 물었고 저는 “넌 어떻게 지내?” 라고 했죠. 그가 말하길, “나 로저 테일러랑 일해. 퀸이 키보디스트가 필요하거든. 너 일 할래?” 저는, “, 물론이지.”라고 했죠.

 

물론 원래는 이런 식으로 되는 건 아니죠. 보통은 다른 키보디스트 200명과 앉아서 당신 차례를 기다리고, 집에 가고, 당신이 떨어졌다는 전화를 기다려야 하죠. 이건 달랐어요. 전 약속장소에 도착했고, 전설적인 게리 스티켈스(Gerry Stickells)에게 면접을 봤어요. 그는 로큰롤의 위대한 인물 중 한명이죠, 슬프게도 올해 세상을 떠났어요.

 

그가 저에게 여권 있어요?”라고 묻기에 있다고 했죠. 그가 월드 투어 갈 수 있어요?” 라고 물었고, 저는 하고 대답했어요. 그가, “좋아요. 월요일에 뮌헨으로 가서 리허설 시작하세요.” 라고 말하기에 뭐라고요? 말도 안돼요. 걔네가 날 싫어하면 어떡해요?” 하고 물으니까 그럼 화요일에 다시 비행기 타고 돌아오면 돼요.” 하더라고요. 그리고 여기 우리가 35년이 지나서 앉아있네요.

 

 

그때와 지금의 당신의 역할은 앨범 음악을 무대 위에서 넷이 할 때보다 더 잘 재현하는 것이죠, 그런가요?

. 확실히 몇 년 동안 더 좋아졌어요. 제가 도착했을 때, 제 전임자들이 보컬로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백 보컬에 대해서는, 존은 노래를 하지 않았고 브라이언은 그가 마이크 근처에 있을 때만 50%정도 노래했어요. 로저는 포로로 잡힌 보컬리스트였고요. 저는 거기에 있었고 별안간 거기에 두 명과 좀 별로인 한명이 아닌 세 명의 보컬리스트가 있었죠. 저는 라디오 가가때 사용한, 보코더라는 한물간 기계를 사용해 노래했어요. 마이크에 대고 노래를 하면 좀 괜찮았어요. 확실히 어느 정도 커버를 해주긴 했지만, 그들이 했던 감미로운 하모니를 하지 못한 것은 항상 부끄러웠어요. 하지만 이젠 달라요. 왜냐면 이제 무대 위엔 여섯 명이 있고 제가 그들 중 최악의 가수거든요. 우리는 그 파트를 할 수 있어요.

 

저는 프레디가 사람들에게 거의 살과 피를 가진 인간만큼이나 신화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현실의 프레디는 그의 이미지와 어떻게 다른가요?

그를 진심으로 아는 사람은 밴드의 세 명과, 짐 비치, 그리고 메리 오스틴이에요.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었고, 팝스타가 메가 스타로 변신할 때 그와 함께 있었죠. 그가 어땠냐고요? 그는 디바가 될 수 있었어요. 그는 정말 재밌고, 그는 꽤 조심스러웠어요. 그리고 꽤 수줍음이 많았죠. 그는 무대 위에서 내면의 락스타를 표출했고 무대 밑에서는 조용한 삶을 좋아했어요. 이게 제가 알던 거예요. 제 생각에 84년 중심으로 그에게 거친 시간들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그는 매우 유명해졌고 공공장소에 나가는 것조차 어려워졌죠. 그의 삶은 은둔의 형태가 되었고 그는 몇몇의 특정한 사람들만을 허용했어요. 한때는 저는 그의 집에서의 파티에 초대받았어요. 우리가 투어중이고 그가 나갈 수 없을 때, 우리는 호텔에 머물면서 그의 스위트룸에 가서 *Trivial Pursuit[각주:1]를 하고 놀았어요. 아주 락앤롤이야.

 

그가 잘했나요?

오 그럼요. 그는 보드게임 할 때 아주 경쟁적이에요. 스크래블은 그에게 중요했고 여전히 로저에게도 그렇죠. 그들은 어마어마한 스크래블 경기를 했었고, 로저는 요즘도 즐겨요.

 

라이브 에이드의 가능성을 처음 들었을 때를 기억하나요?

이렇게 된 거에요. 제가 밥 겔도프와 붐타운 랫츠에 소속됐을 때인데, 제가 퀸과 함께 일하기 시작할 쯤에 붐타운 랫츠와 투어를 돌았어요. 유럽투어가 끝나고, *밴드 에이드(Band Aid)[각주:2] 싱글[Do They Know It’s Christmas?]84년 크리스마스 나왔고 엄청난 히트를 쳤어요. 그리고 전 락 인 리오(Rock in Rio)를 하러 퀸으로 돌아갔죠. 그리고 붐타운 랫츠와 영국 일정을 시작하기 전에 약간 시간이 있었어요. 853월 아니면 4월이었는데. 우리는 매일 밤 마지막 곡으로 밴드 에이드 노래를 연주했어요. 사실은 매 공연마다 모금을 하고 있었어요.

 

투어가 진행되는 동안, 버스 안에서 겔도프가 제게 말하길, “나 이 밴드들이랑 콘서트 열거야: 레드 제플린이랑 다른 여러 밴드들.” 저는 그게 가능해?”라 물었고 그는 런던과 미국에서 할 거야.” 라고 했어요. 저는 절대 안 될 걸. 다함께 모이기 너무 힘들 거야.” 라고 했어요. 그는 가능하다고 주장했죠. 그가 네가 나대신 퀸에게 물어봐줘.”라 말했고 저는, “니가 직접 물어보지?”라고 했어요. 그러자 그가 말하길 내가 전화해서 큰 제안을 했는데 걔네가 싫다고 하면 되게 기분 나쁠 거 같아서.”

 

저는 그를 대신해서 퀸에게 물어봤어요. 뉴질랜드 투어를 하러 가는 비행기 안이었고 저녁 식사 때 말했죠. “겔도프가 너희한테 웸블리 스타디움과 미국에서 동시에 열리는 공연이라는 웃기는 계획에 관심 있는지 물어보래.” 제 생각엔 존 디콘이었던거 같은데, “왜 그가 우리에게 안 물어보고?” 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너희 대답이 뭔지 알려주면 그가 연락할거야.”라고 말했고, 저는 겔도프에게 전화했어요. 겔도프는 짐 마이애미비치에게 전화했고, 이렇게 된 거에요. 나머지는.. 당신도 알잖아요.

 

 

 

리허설과 2시간짜리 공연을 20분으로 줄이는 것에 대해 말해주세요.

그거 알아요? 지나고 나서 보니 비로소 모든 것이 정말 대단했고 중요하고 상징적이었어요. 그 당시에는, 우리는 잘 맞았고 연주할 준비가 되어 있었죠. “시간을 얼마나 받았지?”, “20”, “20분 동안 뭘 할 수 있을까?” , 퀸은 메들리를 하는 것으로 유명하고, 그래서 큰 메들리를 하는 게 분명했어요. 우리는, “뭐가 제일 유명하지? 관중들이 뭘 좋아할까? 그들은 보헤미안 랩소디라디오 가가를 좋아할 거야. 투어에서 가장 좋아했으니까. 우리가 거기 앉아서 출연 순서를 고민하고 있으면 거의 그 스스로 해결이 되곤 했어요. 저는 모두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마스터 플랜은 없었어요. 이건 그냥 상식이었어요.

 

저는 다른 모든 밴드들이 우리가 했던 것을 하지 않고, 그들의 가장 유명한 노래들을 실제 무대에 올리지 않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건 상식이 아니야라고 생각했어요. 우린 상식적인 것을 했어요. 모두가 요점을 놓친 것으로 보였죠.

 

세트에서, 뭔가 획기적인 것을 느꼈나요?

아뇨. 이건 그냥 공연이에요. 우린 매우 기뻤어요. 낮이었어요. 새로운 건 없었어요, 제가 말 했듯이, 우리는 잘 맞았어요. 영화 내용과는 반대로, 그들이 2년 동안 함께 공연하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우리는 6개월 전에 투어 했고 잘 지내고 있었어요. 편집의 의문이에요 그게 우리가 한 거예요. 우린 그냥 편집하고 가서, “좋아, 본전 뽑을 수 있는 게 뭘까? 시작은 보헤미안 랩소디로 하고 기타 솔로에서 라디오 가가로 넘어가자.” 우리가 전 곡을 연주한 곡은 해머 투 폴과 거의 다였죠. 그리고 크레이지 리틀 띵 콜 럽에서 저와 함께 앞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했죠. 프레드에게 고마워요, 그런데 카메라가 찍지 않았죠.

 

당신이 카메라에 안 잡혀서 당신의 출연을 못 믿는 사람을 봤나요?

그럼요, 진짜로!

 

여러 장면을 멈춰서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제가 뒤에서 앞의 피아노로 나올 때 나노초 동안 나와요. 전 거기 앉아서 크레이지 리틀 띵 콜 럽전 곡을 연주했는데 어느 카메라도 절 안 잡아주더라고요. 로저 테일러가 카메라에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한번 확인해보세요. 한 장면도 안 나올걸요.

 

86년도 투어는 무엇과 같았나요?

그건 라이브 에이드의 결과와 같았어요. 퀸의 인기는 지붕을 뚫었고 하이랜더가 발표되었어요. 우리는 84년 투어 때 아레나에서 공연을 했는데, 스타디움으로 옮겼어요. 웸블리 공연 티켓을 팔았는데 매우 빨리 매진되는 바람에 뒤늦게 투어 마지막으로 넵워스 공연을 넣었어요. 웃기는 얘기죠. 그것은, 물론, 프레디의 마지막 공연이었고 퀸의 마지막으로 적절한 공연이었죠. 그들은 촬영하지 않았어요, 그 이후로 모든 것을 촬영해왔어요.

 

 

넵워스 공연을 생각해보면 어떤 점이 눈에 띄나요?

눈에 띈 것에 대해 말씀드리자면, 다들 헬리콥터 타는 것을 정말 즐거워하고 좋아했고, 공연이 끝나자마자 헬리콥터를 타고 떠났어요. 저는 남아있기로 했는데 왜냐하면 무대 뒤에서, 투어 파티의 마지막에는 상의를 입지 않은 수많은 모델들이 가득했고 거기엔 저만 있었거든요. 사진도 있어요. 그리고 집으로 갔죠. 그때는 미혼이라서 괜찮았어요.

 

80년대 퀸의 두 개의 투어를 함께 했는데, 북미에 온 적이 없다는 게 흥미롭네요. 단 하나의 공연도요.

핫 스페이스가 별로 흥하질 못해서요. ‘어나더 원 바이츠 더 더스트이후로 음악에 소울/디스코/펑크적인 것이 너무 많이 들어갔어요. 그리고 그건 이해받지 못했어요, 당신이 지금 그 곡을 듣고 있고, 실제로 정말 좋지만요. 하지만 당시엔 잘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인기가 떨어졌어요. 그리고 라디오 가가가 나왔을 때, 이것 역시 잘 안됐어요. 뒤이어 아이 원트 투 브레이크 프리가 나왔는데 MTV가 방영을 못하게 했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여장을 했거든요. MTV는 문화적인 개그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유럽의 모든 사람들이 그 농담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데. 미국 TV회사들은 농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했죠.

 

말하자면 그들은 틀림없이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을 잃었어요. 그들은 "우리가 다른 세계를 여행하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관중과 함께 연주할 수 있는데, 거기에 가서 줄어드는 청중에게 연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말했어요.

 

92년도에 열린 프레디의 추모콘서트에 많은 부분 참여했죠?

. 저는 “go”라는 말부터 많이 관여했어요. 원본 이름이 적힌 종이가 어딘가 있을 거예요. 우리는 위시리스트에 연주해야하고 노래해야한다고 생각한 이름들을 적어 내려갔어요. 좀 수정되긴 했지만, 사실 많이 바뀌진 않았어요. 런던 북부의 스튜디오에서 시작되었어요. 리허설 장소의 크기가 항공모함만 했죠.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건 데이빗 보위와 애니 레녹스, 엘튼 존 그리고 로버트 플랜트가 함께 있는 병원 대기실 같았어요, 그들이 모두 거기 앉아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진짜 재밌고 비현실적이었죠!

 

 

그날 밤 당신은 데이빗 보위와 믹 론슨과 재결합했죠. ㅡ 정말 대단했어요. 그 공연에서 많은 마법 같은 순간들이 있었는데요.

자랑할 만한 콘서트였어요. 굉장히 기뻤어요. 정말 잘 됐어요. 라이브 에이드처럼, 경쟁적인 분위기가 없었고 다른 아티스트들에게 존경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그건 프레디의 추모 콘서트에서도 일어난 일이에요. 많은 존경이 있었어요.

 

약간 달콤 씁쓸했을 거 같아요. 밴드의 마지막이라고 느껴지고, 프레디 없이 계속 할 방법이 없다고 느꼈을 거니까요.

모두들 그렇게 느꼈어요. 그 외에도, 로저는 더 많은 솔로 앨범을 냈고 브라이언도 그의 솔로 앨범을 냈죠. 이건 마치, “그건 이제 끝났어, 그러니 이건 새 이야기야. 솔로앨범이지.” 라는거 같았어요. 2004년까지 계속됐죠. 꽤 오랜 시간이었어요.

 

당신은 90년대에 브라이언 메이의 솔로밴드와 투어를 했죠. 투어는 어땠나요?

그렇게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저는 퀸 이랑만 일하진 않았어요. 전 다른 것들도 많이 했어요. ‘Hired gun’의 삶 같았죠.(*음악영화) 제가 좋아, 브라이언 메이 투어는 소규모 관객을 위한거야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이것은 여전히 폭발적이었어요. 우린 멋진 연주를 해야 했어요. 그저 다른 구성이었죠. 또한 저는 밴드에서 몇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브라이언이 이끄는 친구들을 사귀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94년에 저는 브라이언의 밴드코지 포웰, 닐 머레이, 그리고 제이미 모스를 빌려왔어요. 그리고 저의 개인 밴드[스파이크의 올스타 밴드]를 시작했고 그들이 모두 참여했죠. 그리고 여기 우리가 있죠, 그때부터 2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진행 중이에요. 9월에 우리의 25주년을 공연과 함께 축하할거에요. 12일 목요일엔 제 홈타운인 포츠머스에서, 그리고 14일 토요일에는 런던의 셰퍼드의 부시 엠파이어에서 공연이 있어요. 모든 수익금은 머큐리 피닉스 트러스트에 기부 될 거예요.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계신데, 책을 쓸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런 말을 하다니 재밌네요. 지난 몇 년 동안 저는 여러 이야기들을 말해왔고, 많은 시간동안 누군가 넌 이 망할 것들 좀 써야한다고!” 라고 말하곤 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보통은 끝없이 마티니를 마시는 해먹속의 나무늘보에요. 그래요, 그런데, 제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서(67살이에요) 드는 생각은, 제 머리가 곧 더 나빠지기 시작할거란 거예요. 그래서 전 노트에 중요 항목을 체크해요. 매번 제가 이야기를 하거나 무언가를 기억하면 저는 그걸 적어둬요. 문제는, 모든 이야기가 다른 다섯 가지를 생각나게 하고, 그 이야기들은 각각 저에게 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해요. 그래서 계속되죠. 제 계산에 따르면 저는 약간의 흥미를 얻었고, 2020년 가을을 맞이할 준비하고 있어요. 저의 SAS 투어가 끝나자마자 전 조슈아 트리의 제 오두막 러브 셰크(love shack)’에 가서 제 자신을 가둬버릴 거예요. 그리고 제 사랑하는 나이든 엄마 브렌다가 말했던 것처럼, “어서 일을 시작해오 이런! 내 자신을 마감기간에 가둔 것 같잖아요! 난 마감일이 싫어!

 

존 디콘이 90년대 후반에 은퇴했죠. 최근에 그와 얘기한 적이 있나요?

아뇨. 몇 년간 그를 보지 못했어요. 그는 매우 은둔자형이죠. 저는 02년 런던에서 뮤지컬 위 윌 락 유첫 공연 이후로 그를 개인적으로 보지 못했어요.

 

그가 그립나요?

. 우린 정말 잘 지냈어요. 우린 동갑이고요. 제가 그보다 두 달 정도 더 어려요. 첫 투어 때 우린 같이 많이 놀러 다녔어요. 우린 매우 비슷한 음악 취향을 가지고 있어요. 알다시피 그는 소울음악의 열혈 팬이에요. 우리는 거기서 유대감을 느꼈죠, 그는 언제나 놀러 나가려했고 저도 그랬어요. 그들과 함께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요. 전 그가 그리워요, 그렇지만 그는 그의 길을 선택했어요.

 

퀸과 폴 로저스의 시작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 폴 로저스가 밴드 프리의 리드 싱어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퀸의 멤버들은 그 밴드의 대단한 팬이었죠. 저도 그랬어요. 저는 프리가 아일 오브 와이트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는 것을 두어 번 본 적이 있어요. 저는 폴 로저스의 큰 팬이었어요. 어떤 일이 일어났냐면, 가짜 TV 시상식 중 하나가 무대에 오를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새로운 상을 만들었어요. 실제론 아무 의미 없었어요. 폴은 밴드가 없었고 퀸은 보컬이 없었죠. 그래서 프로듀서가 말하길, “폴이 위 아 더 챔피언을 불러주면 폴의 ‘All Right Now’를 연주해줄래?” 아마 그것보단 말이 더 많았겠지만, 핵심은 그거였어요. 그들은 폴의 열혈 팬이었고 그들은, “좋아. 그가 원한다면.”하고 말했죠. 우리는 리허설을 했고, 그가 노래했고, 정말 좋았어요. 우리는 연주했고 그 다음은 알다시피 우린 투어를 했어요. 굉장히 잘 됐죠.

 

개인적으로 저는 폴 로저스의 목소리를 좋아해요. 그는 다른 밴드의 음악을 노래하는데 아주 훌륭했습니다. 그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블루스와 소울을 노래하는 거였죠. 그렇게 예리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건 알지만, 저는 예리했어요. 저는 이게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전 여전히 그의 요즘 작업도 좋아해요.

 

 

로저가 폴 로저스를 가수로서 좋아하지만, 그는 퀸의 음악 하기에 좀 블루스 하다고 한 것을 봤어요.

일부는 그렇습니다. 몇 곡은 그와 맞지 않아요. 하지만 그가 노래를 하면, 그는 정말 잘 했어요. 제 생각에 그런 결정을 한 폴에게 진심의 존경을 표해요. 왜냐하면 이건 끔찍하게 잘못되고 그에게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는 제게서 깊은 존경심을 끌어냈어요.

 

투어가 끝났을 때, 당신은 이게 끝이라고 생각했나요?

전 항상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일어나는 일 외에 어느 것도 볼 수 없었어요. 나는 어떻게, 왜 그들이 이걸 하는지 몰랐어요.

 

저는 유튜브에서 마크 마텔을 봤어요, 그리고 그는 프레디처럼 불렀죠, 하지만 당신은 흉내 내는 사람을 원하지 않았다고요.

아뇨, 그건 절대 원하지 않는 거예요 왜냐면 그렇게 되면 그건 헌정 밴드가 되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사람들이 그는 프레디를 닮았지만 프레디가 아니야.”라고 말하길 원하지 않을 거예요. 아담은 프레디처럼 들리지 않지만, 그는 엄청난 가수에요. 그리고 사람들은 이제 그것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좋아, 그는 프레디도 아니고, 프레디처럼 부르지도 않고, 프레디처럼 생기지도 않았어, 하지만 그는 존나게 잘하고 있어.”

 

 

그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기억을 얘기해주세요

제 아내가 그의 노래를 처음 들은 사람이었어요. 우리는 조슈아 트리에 있었고 저는 우리 오두막 러브셰크 밖에 앉아 있었어요. 그리고 아내 절 부르더니, “와서 이거 보는 게 좋을걸.” 저는 뭔데?” 했고 그녀는 아메리칸 아이돌이라고 말했죠. 저는 난 그런 거 안 봐. 내가 볼만한 게 없어.”라고 했죠. 하지만 아내는 아냐. 이리 와봐라 했어요.

 

저는 마티니를 더 가지러 들어갔다가 그가 “Whole lotta love”의 마지막 부분을 부르는 걸 봤어요. 그가 제일 마지막 부분을 불렀을 때 저는 여깄다. 여기에 있었네.” 하고 생각했어요. 그는 곡의 마지막을 불렀고 힘들어 보이지 않았어요. 저는, ‘. 이런 자신감을 가지고 노래를 하려면 엄청 노력해야 하는데.’ 하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의 이름을 구글링했고 처음으로 본게 그가 오디션에서 부른 보헤미안 랩소디에요. 저는 메일을 보냈죠. ‘살아있는걸 찾았음.’

 

누구에게 보냈나요?

로저요. 그리고 그 과정이 몇 주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결승전이 다가왔을 쯤에 퀸은 두 결승진출자와 공연할 수 있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아담과 다들 기억 못하는 다른 한명이었죠. 계약이 즉시 성사됐어요. 그들은 아담을 의식하고 있었어요. 왜냐면 로저는 제가 메일을 보낸 후로 아담을 주시하고 있었거든요. 그들은 함께했고, 아담은 확실히 매력적인 남자이고 남들과는 다르게 노래를 할 수 있어요. 우주가 원소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그가 너무 어리다거나 다른 걸로 걱정을 했나요? 의심을 했나요?

아니요. 제겐 노래하는 게 전부였고, 진실은, 그는 TV에 나오는 엘비스 같았어요. 저는 얘랑 잘못될 수가 없어. 게이 엘비스가 퀸의 노래를 부른다? 단점이 있나? 없어.” 라고 생각했죠.

 

아담과의 첫 리허설은 어땠나요?

고통이 없었어요. 우리가 함께 한 첫 번째는 벨파스트의 MTV 유럽 시상식이었어요. 다시 말하지만, 많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서 메들리를 하는 게 보통이었어요. 그 이후로 라스 베가스에서 아이하트라디오 페스티벌 공연이 따라왔죠. 그 두 공연은 정말로 그가 노력했다는 것과 무대에서 침착한다는 것을 입증했어요.

 

퀸은 빠르게 일하는 걸 좋아했어요. 어떤 것에 매달려서 너무 많은 시간 보내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하거나 버리거나 였죠. 다행히도, 아담은 꽤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우리가 이렇게 해보자,”하고 말하면 그는 곧장 해요. 우리는 그에게 설명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었어요. 그는 지시를 아주 잘 따라요. 그는 제가 도움이 된다는 걸 빠르게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는 항상 저에게 시선을 고정했죠. 가끔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할 때 저는 그에게 끄덕이고 눈썹으로 그에게 지금이라는 신호를 줘야 했죠. 우리는 무대 위에서의 좋은 음악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요. 여전히 그러고요, 하지만 그는 이제 모든 걸 알아요. 그는 더 이상 날 쳐다볼 필요가 없어요.

 

우크라이나 공연은 어땠나요? 아담과 함께한 첫 공연인데요. 조마조마했을 텐데요.

사운드체크가 거의 없어서 정말 긴장했어요. 엘튼 존은 여길 빨리 나가고 싶어 해서 우리보다 먼저 공연했어요. 그 다음에 우리 차례였는데, 꽤 큰 결정이었어요. 아주 많은 관객이 있었어요. 얼마나 컸는지는 모르지만, 광장을 가로질러 길 양쪽으로 늘어서있었고, 길 양쪽에 스크린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매우 큰 공연이었고 굉장히 긴장했어요. 하지만 그는 시험을 통과했어요. 우리 모두 시험을 통과했어요.

 

 

첫 미국투어는 약간 알려지지 않았죠. 밴드는 82년 이후로 미국 투어를 하지 않았어요. 기획자들도 약간 확신이 없었을 거 같은데요.

우린 믿음이 있었어요, 하지만 관객들은 그런 게 있었어요. 어떤 이들은 말해요, “쟨 프레디가 아니잖아. 쟤들 뭘 하고 있다고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많은 평론가들이 말하길, “프레디가 퀸에 없다면, 그들을 보러갈 이유가 뭐죠?” 오랜 팬들은 처음에 이런 태도를 보였어요. 그러나 아담이 무대에 가져온 것과 그가 불어넣은 새 생명을 보고, 아담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그리고 지금 우리가 어디 있는지 보세요.

 

그가 또한 퀸을 잘 모르는 그의 개인 팬들을 공연으로 데려왔죠.

처음에 관객들은 이게 다 뭐야?” 라고 팔짱을 끼고 말하는 오랜 퀸의 팬들과 아담이 애정 하는 이 옛날 밴드는 뭐야?” 하는 아담의 팬들로 분열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엔 부모의 음반을 듣고 자란 퀸 팬인 어린아이들도 있었죠. 이제 정말 달라졌어요. 90에서 95퍼센트 관객들은 프레디와 퀸의 라이브를 실제로 본 적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어요. 하지만 그들은 프레디를 화면에서 봤고 노래들을 알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 노래들은 TV광고나 스포츠 행사 같은 것들 때문에 모든 이들의 음악 의식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인식도 못하고 있지만 퀸 노래의 반더즌은 아는 거죠.

 

저는 팻 바텀 걸을 시작할 때 10대들이 기뻐서 우는 걸 봤어요. 그리고 "나는 1975년에 그들을 봤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나이든 사람들이 들이 있어요. 그들은 같은 열정으로 노래를 함께 불러요. 이건 장르와 세대를 가로질러요, 그들이 항상 하던 것이죠. 퀸은 결코 유행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결코 인기 없지 않죠.

 

 

로저와 브라이언은 공연을 통해 매우 행복해 보여요. 그들은 수년간 이 곡을 연주할 기회가 없었죠, 그리고 마침내 다시 하게 되었어요. 그들의 일생의 업적이란 실제 증명이죠.

맞아요. 가장 중요한건 음악이에요. 그들이 거기에 있는 이유죠, 하지만 그들에게 매디슨 스퀘어 가든 티켓을 팔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은 꽤 보람 있을 거예요. 그들은 내년 투어에 비트를 더 추가할지에 대해 계속 얘기를 나누고 있어요. 이건 대단해요. 그들은 둘 다 70대에요, 저도 멀지 않았고요. 이런 공연을 하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도전이에요. 우리는 투어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다들 몇 주간 누워서 쉴 준비가 된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린 9월에 글로벌 시티즌 페스티벌을 위해 뉴욕에 다시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어요.

 

처음 들었을 때, 퀸 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느꼈나요?

.. 의심스러웠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 저는 라미 말렉은 환상적이고 오스카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멋지게 해냈어요. 하지만 헐리우드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할 때 드라마틱함을 주기 위해 이야기를 좀 움직이죠. 그리고.. 이게 진짜 버전이에요. 얘기해봅시다.

 

팬으로서 보기에 좀 이상했어요, “잠깐만. 위 윌 락 유를 80년대에 쓴게 아닌데. 그리고 쟤넨 라이브 에이드 전에 헤어지지 않았어.”

그래요, 그런 것들. 그게 현대 오락의 방식이에요. TV에 나온 것이 진실이 되어버리죠.

 

그런 식으로 표현되는걸 보는 건 꽤 기분이 이상했을 거 같은데요.

혀를 깨물어야 했죠, 인정해요. 그러나 이게 인기 있는 오락이죠. 현실을 직시해봅시다. 음악이 만들어지는 방식, 노래를 못하는 가수들이 히트를 쳐요. 영화는 만들어지고, 진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죠.

 

영화의 좋은 점은 모든 새로운 관객들에게 퀸의 음악을 소개했다는 거죠.

! 그 곡선은 이미 이전 투어부터 상승하고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이 아담병에 걸려서, “그는 이거 하기에 정말 좋은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었고 시장성과 사람을 끄는 힘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후 영화가 크게 개봉한 거죠. 제 생각에 그들은 남은 삶 동안 투어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이 투어는 영원히 계속될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진 않겠죠. 사람들이 영화에 나온 모든 곡을 열창하고, 영화에 나오지 않은 곡에선 암전되는걸 보는 건 재밌어요.

 

아담이 지난 9년간 어떻게 가수와 퍼포머로 성장했나요?

그는 공연에 관해서는 자기주장이 확실했어요. 그리고 그는 밴드의 역사인 프레디를 존중하는 것과 스스로의 견해를 표현하는 것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어왔어요. 아담은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는 퀸의 노래를 부르는 아담 램버트입니다. 그는 언제나 노력했어요. 그는 언제나 무대 위에서 침착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즐기고 있죠.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로저와 브라이언이 은퇴한 뒤의 버전인 퀸버트가 보이시나요? 계속할 수 있을까요?

! 생각지도 못한 흥미로운 컨셉이네요. 나는 몰라요. 와우. 당신은 아무한테도 절대 말하지 않잖아요, 그렇죠? 누군가 그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시장이 있다면, 누군가 나타나서 음악을 연주하겠죠. 그것에 어떤 모양으로 나타날지 나는 말할 수 없어요. 그리고 이 사람들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주위를 둘러보면, 스톤즈는 여전히 현역이고, ‘I hope I die before I get old’(*더 후 노래)라고 하곤 했지만, 더 이상 그렇지 않잖아요? 내 생각에 그들은 집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세계를 다니며 엄청난 시간을 보낼 거 같아요. 저는 제가 뭘 하고 싶은지는 알아요.

 

마지막으로, 평생 동안 “보헤미안 랩소디”를 몇 번이나 들은 것 같나요?

너무 많이요. 정말로 너무 많이요!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features/queen-keyboardist-spike-edney-interview-freddie-mercury-live-aid-bohemian-rhapsody-875956/?fbclid=IwAR1gJoa4WI_2pKzTldh2WfWCi_it-ZVb_qPmPp0kI3xCg-F5PiCdohT2Bug

 

Queen Keyboardist Spike Edney on Live Aid, What Freddie Mercury Was Really Like

The band’s secret weapon shares 35 years of Queen memories, from playing Trivial Pursuit with Freddie Mercury to discovering Adam Lambert on ‘American Idol’

www.rollingstone.com

 

 

* 글을 사용하실 경우 출처를 밝혀주세요


사족

분량이 A4 11장 분량으로 너무 많았지만 재밌어서 다 번역해버렸다 이틀을 꼬박 투자했지만 가치가 있었당..♥

사전 찾고 구글링하고 번역기를 3번 돌리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구글링이 국어실력은 늘려주지 않아서 어색한 부분들도 많이 있을거라 생각되는데 최대한 그대로 옮겨보려 노력했고 오역 의역 당연히 많을듯 ㅠㅠ... 원뜻이랑 너무 다르게 번역된 부분 있으면 얘기해주세요 칼같이 고치겠습니당

 

에드니옹 계속 함께해줬으면 좋겠다 사랑해요

  1. 보드게임 https://www.google.com/search?q=Trivial+Pursuit&newwindow=1&source=lnms&tbm=isch&sa=X&ved=2ahUKEwizsLKKworoAhVOFqYKHelQDa4Q_AUoAXoECAwQAw&cshid=1583658086595426&biw=1920&bih=969 [본문으로]
  2. 1984년 영국의 뮤지션들이 모여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에 계속된 가뭄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난민들을 돕고자 모색된 프로젝트 밴드 출처 https://blog.naver.com/gakbum/221424719932 [본문으로]